[지역의 눈으로 보는 G2] 베이다이허 비밀회동과 시진핑의 속내
영남일보
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이정태
중국정치가 재미있다. 무협소설에나 있을 법한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어서다. 지난 7월 말 티베트에 잠시 모습을 드러냈던 시진핑 주석과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전부가 어느 날 갑자기 세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소문으로는 허베이성 친황다오(秦皇島)의 베이다이허(北戴河)에서 비밀회합을 가진다고 했지만, 구체적인 일정이나 참석인원 그리고 토의내용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회의가 끝나고 나서도 함구령이 내려졌는지 추측성 기사와 댓글만 요란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베이다이허 회합이 열린 친황다오는 청나라 황제의 여름별장이 있던 청더(承德)와 가까운 해변도시다. 국민당 시기부터 권력층과 외교관의 별장이 자리했고, 지금도 공산당 지도부의 별장이 수백 개가 있는 여름 피서지다. 그래서 베이다이허 회의는 얼핏 보면 중국 지도부의 여름휴가 행사로 보이는데, 그 기원을 살펴보면 특별한 정치적 의미가 있는 회합임을 알 수 있다.
베이다이허 회의가 처음 열린 것은 1954년이지만 공식회의로 출범하게 된 것은 1958년이다. 마오쩌둥과 공산당 지도부가 참여한 1958년 첫 공식회의에서는 대만의 진먼다오(金門島) 포격, 인민공사 설립, 대약진 운동의 전개 등이 결정됐다. 신중국 초기 중국지도부의 의지와 정책 방향이 투영된 가장 핵심적인 회의체였던 것이다.
사회주의 중국의 방향을 전환시킨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도 베이다이허 회의를 통해 관철됐다. 1990년 덩샤오핑은 보수파의 저항을 뚫고 중국식 사회주의라는 개혁개방 노선을 택하게 되는데 그 기반이 베이다이허 회의였다.
그러고 보면 베이다이허 회의는 권위적인 전통중국의 밀실정치와 음험하고 비밀스러운 사회주의 중국정치의 특징이 교묘하게 배합된 회의체라고 할 수 있다.
베이다이허 회의는 매년 7월 하순부터 8월 초순 무렵에 개최되는데, 정해진 기간 없이 10~20일간 지속된다. 회의 형식이나 결정 과정도 일정하게 정해진 바 없지만 중국의 당면문제에 대해 밤을 새우며 갑론을박 논쟁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마치 무림의 최고고수와 각 방파의 장이 모여 최고의 승자를 가릴 때까지 혈전을 벌이는 것처럼 중국의 전·현직 지도부와 당∙국무원 등 중앙 및 지방간부가 모여 소위 끝장토론을 벌이는 전장인 것이다.
거론되는 내용은 주로 중국이 당면한 정치∙경제∙사회 현안이나 공산당 내의 주요 문제가 거론되고, 회의에서 합의한 사안은 당해 가을에 개최되는 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결의 형식으로 공개되며, 다음 해 봄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 구체적인 정책으로 제시된다.
베이다이허 회의를 통해 매년 가을 열리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의 주요 의제를 사전 조율하고 차기 지도부 구성 등 주요 인사문제를 논의하는 자리로도 활용된다. 논의 내용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지는 않지만 중국의 권력 향배와 정책 방향을 점칠 수 있는 자리가 되기 때문에 관심이 집중된다.
올해 베이다이허 회의에 주목할 점은 차기 중국지도부 구성이다. 왜냐하면 시진핑의 집권 연장 여부가 결정될 제20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를 1년 앞둔 시점이기 때문이다. 중국 내 여론이나 전문가 의견으로는 시진핑이 당연히 재집권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2018년 헌법개정을 통해 국가주석직의 연임제한을 철폐시킨 상태여서 시진핑 주석의 집권연장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그러나 변수는 많다. 상하이방의 거두 장쩌민이나 공청단을 대표하는 후진타오의 영향력이 약화됐고, 최고의 경쟁상대였던 보시라이가 완전히 제압됐다고 하지만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정적뿐만 아니라 국방개혁 추진 과정에서 숙청된 군부인사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불만 세력이 팽배하고 있다. 시진핑 집권 이후 기존의 지방군벌 중심의 6개 군구(軍區)체제를 중앙군 중심의 5개 전구(戰區)체제로 개편하면서 상당한 수의 군 수뇌부가 숙청됐다.
그리고 전역한 군인에 대한 보상과 지원이 축소되면서 군부 전체의 불만이 폭증하고 있다. 위험한 상황이 초래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최근 베이징에서 열린 공산당 창당 100주년 행사에서 과도한 보안검색과 삼엄한 경계상황이 연출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고 한다.
파리부터 호랑이까지 다 때려잡겠다고 시작한 부정부패와의 전쟁도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고구마 줄기처럼 엮여서 숙청된 인사들이 부지기수이고, 심지어는 특정지역 공무원 절반 이상이 해고된 경우도 있다. 억울하게 당한 입장에서는 변명할 기회를 찾거나 반격하게 된다.
또 다른 가능성은 시진핑 스스로 집권연장을 포기하는 경우다. 시진핑이 연임제한 철폐를 제안할 때 제시했던 명분은 서구국가의 선거와 권력교체 시기에 발생하는 레임덕 병폐였다. 중국정치 역시 같은 상황이 반복됐는데 보시라이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중임제였을 당시 두 번째 임기 동안은 권력투쟁으로 인해 국가분열과 국정공백이 초래되는 악순환을 겪었다. 때문에 시진핑 스스로 연임제한 조항을 철폐한 본래 목적에 부합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베이다이허 회의가 종결됐음에도 중국 언론이 일제히 침묵하고 있다. 특히 시진핑 주석의 연임과 관련된 보도 내용은 전무하다.
1953년 생인 시진핑 주석은 푸틴처럼 제왕적 권력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집착할까. 후춘화, 천민얼, 리창을 비롯한 젊은 후기지수(後起之秀)를 믿지 못하고 노익장을 과시하려 할까. 아니면 중국의 발전과 젊은 중국을 위해 후대에게 자리를 내어줄까. 그의 진정한 속내가 자못 궁금하다.